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마사아키 (문단 편집) == 지도자 시절 == [[파일:external/www.zakzak.co.jp/bbl1108040924000-n1.jpg]] 현역이던 1972년 부터 요미우리의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다. 은퇴 후, 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요미우리 팀 선배 [[히로오카 타츠로]]가 감독을 맡은 [[야쿠르트 스왈로즈]]에서 1978년과 1979년에 팀의 배터리 코치로 활동하면서 1978년 스왈로즈의 사상 첫 [[센트럴리그]] 우승, [[일본시리즈]] 우승을 경험한다. 이후 1979년 히로오카가 최하위로 떨어진 팀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자신도 코치직에서 물러나 잠시 TV 해설위원으로 돌아갔다가, 1982년부터 1984년에는 다시 히로오카 감독이 이끄는 [[세이부 라이온즈]]의 수석 겸 배터리 코치를 3년간 역임했다. 엄격한 관리와 통제로 대표되는 히로오카 감독의 '''관리야구''' 코칭 스타일에 따라 선수들의 경기장 밖에서의 사생활까지 관리하여 '모리 [[KGB]]', '모리 [[미국 중앙 정보국|CIA]]'라는 원성을 듣기도 했다. 그러나 모리 역시 그 당시 히로오카의 이러한 방침을 선호하지 않았으며[*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낸 [[에나츠 유타카]]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밤 원정 숙소에서 점호를 마친 뒤 모리가 자신의 방을 찾아와서는 한숨을 쉬며 '''"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은 아닐세. 다 [[히로오카 타츠로|감독]] 방침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일 뿐"'''이라고 그가 안고 있던 맘고생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. 그리고 세이부 감독에 취임한 뒤 선수단에 외박이라던가 육식 등 히로오카 시절 금지되었던 행동을 허용하고, 경기력이 저하되지 않는 선에서 선수들의 개인적 취미 활동도 허락하는 등 자신의 소신대로 선수단을 통솔했다. 결국 모리는 일본 시리즈 3연패와 퍼시픽 리그 5연패라는 [[넘사벽]]급 성적을 거두며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. ~~대신 어떤 [[기요하라 가즈히로|천방지축]]을 신인 때부터 풀어놓고 키운 탓에 결국 자기관리 부족으로 인생을 망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.~~] 후에 히로오카와의 갈등을 빚으며 세이부의 코치직을 내려 놓았다. 다시 야인으로 지내던 중 1986년, 히로오카가 떠난 [[세이부 라이온즈]]의 감독직을 맡았고 이때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다. 감독 재임 기간 동안 [[퍼시픽리그]] 우승 8회(1986년 ~ 1988년, 1990년 ~ 1994년[* 1989년은 [[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]]가 우승.]와 [[일본시리즈]] 우승 6회(1986년 ~ 1988년, 1990년 ~ 1992년)의 대업을 달성했다. 이 당시의 세이부는 [[네모토 리쿠오]] 단장의 총 지휘 하에 우수 선수를 많이 영입했다. [[쿠도 키미야스]]-[[와타나베 히사노부]]-[[곽태원|궈타이위엔]](일본명 가쿠 타이겐), 황금기 말기에 합류한 신진 에이스 [[이시이 타케히로]] 등이 포진한 강력한 선발진에, 카토리 요시타카와 시오자키 테츠야 등이 버틴 [[불펜투수]]들이 돋보였다. 야수에도 내야의 사령탑이었던 유격수 [[이시게 히로미치]]를 리더로, 안정된 수비가 돋보였던 2루수 [[츠지 하츠히코]], 이시게가 부상으로 인해 3루수로 전향하며 유격수를 맡은 [[타나베 노리오]], 고교 졸업 후 첫 시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 [[기요하라 가즈히로]], 호타준족의 대명사 [[아키야마 코지]], 거포 [[스위치 히터]] [[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]], 모리의 후계자이자 명포수 [[이토 쓰토무]] 등이 맹활약하던 그야말로 황금기였다. 그러나 1994년 [[일본시리즈]]에서는 현역 시절 친정팀인 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와의 6차전을 앞두고 요미우리 구단의 모기업인 [[요미우리 신문]]에서 ‘세이부·모리 감독 사임’ 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 상처를 입기도 했다. 게다가 이 소식은 [[도쿄돔]] 전광판에 대서특필되었다. 그리고 결국 이 해 일본시리즈는 요미우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. 감독에서 물러난 뒤 여러 군데에서 야구 해설 위원으로 지냈으며 요미우리 구단 프런트에서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으로 고려되었지만 세이부에서 코치-감독을 역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거인 감독직은 꿈으로 끝났다. [[요미우리 자이언츠/순수혈통주의]] 문서 참조.[* 타 팀의 코칭 스태프를 역임한 뒤 요미우리 감독에 취임한 사례는 1975년~1976년 시즌 [[다이요 훼일즈]] 투수코치를 역임한, 모리와는 선수 시절 팀동료이자 감독으로서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하기도 했던 [[후지타 모토시]]가 유일하다.] 2001년에는 [[요코하마 베이스타즈]]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, [[곤도 히로시]] 감독 시절의 자율야구와는 다른 빡빡한 관리야구 스타일이 팀에 먹히지 않았고, 2002년 시즌에 결국 팀이 꼴찌로 추락하면서 시즌 종료를 앞두고 사임했다. ~~그리고 요코하마는 긴 암흑기로...~~[[https://news.joins.com/article/788296|#]]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. 2005년 [[KIA 타이거즈]]의 하와이 스프링캠프에 방문한 적이 있다. [[http://sports.news.naver.com/kbo/news/read.nhn?oid=109&aid=0000005738|#]] 2016년, 제자 기요하라가 마약 복용 혐의로 피소됐을 때 현역 시절 선수 지도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라이벌 [[노무라 카츠야]]에게 비판받았다. [[http://www.sportsq.co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141005|#]] 2018년 7월 20일 [[메트라이프 돔]]에서 열린 세이부 홈경기에 '''레전드 OB'''로 등장하여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OWgMVFcC8NQ|시구]]를 맡았고, 경기 종료 후 토크쇼를 가졌다. 학생 팬이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책을 읽어왔다고 하자 흐뭇해하기도... [[https://www.seibulions.jp/news/detail/00001720.html|#]]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V7aV-hAWs9Q&t=1777s|토크쇼 직캠]] --백발의 교수님이 되셨다-- 하와이에 거주하다가 2022년에 [[후쿠오카현]]으로 이사했다. 2023년 모교(기후고등학교)를 방문해 격려했다. 모리는 "야구는 이기려고 노력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기적으로 맡은 일을 연마하고 자신을 믿고 제대로 하면 반드시 결과가 따라온다"고 시합에 임하는 지혜를 가르쳤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